나는 종종 내 심장에서 뜨거운 것을 느낀다.
무언가 해야하는 것 같은데 그것이 무엇이 모를 때
나는 방에 가만히 앉아 내 자신에게 가해지는 이 압력을 느낀다.

이것은 심장에서 느껴지는 뜨거움이다.
나는 이 느낌에 대해서 고요히 느껴본다.

이 뜨거움은 세상에 표현되기를 원한다.
이 뜨거움은 발산되려는 에너지이다.
이 뜨거움을 나는 어찌해야할지 모르겠다.

그 무엇을 해도 이 뜨거움은 해소가 되지 않는다.
영화를 봐도, 사람을 만나도, 회사를 다녀도, 책을 읽어도 이 심장 속 불꽃같은 뜨거움은 다시금 피어나와 내게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종용한다.

불안하다는 것은 이 뜨거운 것이 어디로 나아가야할지 모르는 데서 시작된다.
나는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는데 이 뜨거움은 무언가를 하라고 한다.
도대체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일까?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무엇이 되고자 하는 것인가?

뜨거움은 나른한 휴일 오후 불현듯 찾아와 심장속에서 묻는다.
'해야만 한다.'
나는 묻는다.
'무엇을 해야하는가?'

답은 여전히 알 수 없고 나는 무언가를 찾다가 다시금 수많은 인터넷의 정보속에서 헤메인다.
그래도 여전히 이 뜨거움이 가고자 하는 곳을 찾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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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이 걱정을 사람들에게 마구 말하는 나쁜 습관이 있다.
내가 이 걱정을 처리해야한다. 감정 쓰레기통으로 다른 사람을 만들면 안된다.
나는 참 나쁜 얘인 것 같다.
사람들에게 의지하고 뭔가를 얻으려고 하고 빼앗는다.
아주 나쁜 습관이다.
사람들에게 무엇을 줄까를 생각하자.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진정한 경청과 존중, 배려이다.

걱정이 많은 것은 누구나 그렇다. 그 걱정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가시키지 말자.
압박을 해결하는 것은 내가 스스로 해야한다.

부끄럽다. 내 인생을 다시 살고 싶다.
상대를 전혀 배려하지 않는 나의 나쁜 습관들을 고치고 싶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모르겠다.
배려하고 싶다. 상대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 싫다.

내안에는 통제가 잘 안되는 괴물이 살고 있다.
심심하면 드러나와서 내맘을 온통 헤집고 남들까지 헤친다.
이 고통스러운 나의 삶에서 나는 규칙과 고요함을 찾고 싶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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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업가가 되고 싶다.
어렸을 적부터 사업가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적인 어려움에 부딪혔다.
나는 어떻게 사업에 성공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이제 나는 꿈을 어떻게 이루어내야하는지 잘 모르겠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사업가가 되어야하는지 잘 모르겠다.

정말 화가 날 때도 많고 짜증도 난다.
나는 이게 정말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할 지를 모르겠다.
이것은 내 욕망이 아니라 주입된 어떤 사회적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왜 사업가가 되고 싶은가? 그리고 뭔가 높은 계급으로 올라가고 싶은가?

무엇보다 나는 왜 잘 살아야하는가?
잘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나는 모른다. 어떻게 살아야 즐겁고 행복한지 잘 모른다.
그래서 이것 저것 해보고 남들이 좋다는 것을 얻어야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있다.
모르니까 남들 말을 참고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은 것 같다는 생각도 실로 드는 경우도 많다.
남들에게 좋은게 내게 좋은 건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냥 남의 것이 부러워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는 잘 보이지 않는다.

남들은 다 잘 살고 행복해 보인다.
인스타도 하기 싫다.
다들 행복해 보인다.
나는 가지고 싶은게 많은데 가질 수가 없다.

수많은 성공스토리들을 들으며 나도 저렇게 되고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과 다르고 삶은 내게 미지의 것이다.
알 수 없다. 그저 하루 하루 살아나갈 뿐이다.
나는 이제 이 젊음과 삶은 어디에 바쳐야하는가?
하루하루 시간은 감에도 나는 내 자신을 헌신할 무언가를 아직도 못찾았다.
나는 나를 헌신하고 싶다. 내 자신을 바쳐 혼신을 다할 무언가를 찾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렇게 내 시간이 소멸되고 내 삶이 곧 다해버릴 것 같다.
그런데 아직도 보이지를 않는다.
무엇을 해야하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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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당하고 떨어진다는 것은 정말 기분이 나쁜 일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결국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다.
나머지는 내가 뭔가 가치있고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기분이 좋아지는 효과가 있을 뿐이다.

회사에 지원하고 이성친구를 사귈 때, 우리는 거절당하기도 한다. 때로는 나를 여럿이도 원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거절당하면 기분이 좋지 않다. 여럿이 나를 원하면 기분이 좋다.
누군가에게 필요하다는 느낌은 정말 좋은 것이다. 자신의 가치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항상 우리가 필요해질 수는 없다. 삶의 여러 시간들 속에서 필요도 하고 필요하지 않기도 하다.
내가 사회에 필요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할까?
내 자신이 그 자체로 가치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할까?

회사를 다니다 잘리는 경우가 생긴다. 정말 힘든 시간이다.
어떻게 하면 누군가에게 계속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필요하다면 그 사람은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고 그 필요가치가 커지면 가족을 안정적으로 부양할 수 있다.
자신의 필요가치를 끊임없이 증명하고 만들어내야하는 빠른 변화의 시간속에서 어떻게 살아야할까?

우리는 계속해서 불안하고 두렵다. 그 근본적 원인은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찾지 못해서이다.
내가 왜 존재해야만 하는가?
자존감 또는 존엄성(나는 이 단어를 더 좋아한다)은 이 질문으로부터 파생된다.
우리는 이 세계속에서 왜 존재해야만 하는가?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가 없다면 존엄성의 그 근본가치는 뿌리부터 흔들리게 된다.
사람은 이 이유, 즉 삶의 의미를 반드시 추구하게 되어있다.
그리고 이 이유를 찾는 방법으로는 주변 사람들이 있다.
사회속에서, 가족속에서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는다.
나는 아버지이고 아들이고 부장이고 싸이클 동호회 회원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구성된 언어적 구조물들이다. 그 내부의 내용적인 것들은 실로 매우 특수하고 방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

자신의 존재의미를 강하게 찾으면 그 사람은 강한 사람이 된다.
가족, 회사, 모임 등에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고하게 하면 책임감과 함께 자신의 필요성이 명확해져 삶의 의미가 생겨난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진정으로 자신의 존재 의미인가?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핵가족화와 이직률 상승, 모임의 감소 등을 생각하면 전 사회는 무언가 인간관계의 근본적 변화를 요구한다.
자기 자신의 의미를 다시금 재해석하고 재규정하는 시간이 도래했다.

나는 누구인가? 이 세상에서 어떤 서사를 가지고 살아가는가?
알 수없는 미지의 삶속에서 어떻게 부유하지 않고 굳건히 버티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고통스럽다. 삶은 정말 지독히도 고통스럽다.

이 끊임없는 고뇌. 내 자신을 찾고자 하는 노력과 현실적 한계.
우리는 여기서 도대체 무엇을 하는가?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사실 곰곰히 생각해볼 때, 이 삶이라는 물자체는 이해될 수가 없다.
그리고 나라는 이 말을 하는 언어적 구조물은 본질적으로 구조적, 언어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정보의 밀도는 실수와 자연수의 밀도차처럼 다르다.
현실은 꽉차있는 반면 우리의 인식구조는 자연수처럼 나열가능하다.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현실을 모두 담을 수 없다.

우리는 이 삶에서 무언가를 이해하려고 하는 그 욕구와 충동을 버릴 수 없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현실적 한계를 마주하고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나는 마음의 한 귀퉁이가 매우 두렵다.
받아들이고 놓아버리는데 큰 장애가 하나 있는 것 같다.

놓아버리면 뭔가 잘못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뭔가 이 세계와 연결고리가 크게 끊길 것 같다는 두려움이 든다.
무언가를 잡아야할 것 같은 이 느낌이 있다.

이 두려운 느낌을 나는 버려야하는 것일까? 아니면 내게 남은 현실적 보호장치인가?
그냥 산다는 것. 그것은 참 아름다운 것 같기도 하고 두려운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잘살고 싶고 남들과 내 자신을 비교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내가 지금 내 수준보다 더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무언가 방법을 찾고 싶다. 지금의 내 위치보다 더 높은 위치로 가고 싶다.
명예와 재산은 우리에게 많은 기쁨을 준다. 사회 속에서 증명되는 가치이기 때문인 듯 하다.

명예는 사회적으로 인정된 필요성이며 재산은 자신을 돈을 원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의미있는 존재가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환가능한 물질이 없다면 의미가 없다. 소비가 의미를 만든다.
소비하지 못하는 존재는 자본주의 체계내에서 거의 자리가 없다.
나는 옷을 사고, 밥을 사고, 여행을 산다. 이것이 삶이다.
옷, 밥, 여행. 왜 나는 사는가? 왜 나는 이것들을 사는가?
산다는 것은 사는 것이다. 삶은 무언가를 사는 것이다.
이것이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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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말 시험을 두려워하는 스타일이다.

시험보는 것과 잘봐야한다는 두려움

남들은 너무 잘할 것 같다는 걱정

공부를 더해야하는데 노는 것 같다는 걱정 등 너무도 많은 걱정이 산재한다.

 

하지만 최대한 생각을 놓고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하기로 했다.

GSAT도 너무 어렵고 못 풀까봐 자료해석과 추리를 어제 오늘 나눠서 풀어봤다.

점수가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다행히 PSAT보다는 풀만하고 열심히 꾸준히 풀면 충분히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도 퍼즐이라서 공부하는데도 지루하지는 않다.

 

오늘 문제를 풀어보니 내가 너무 빨리 풀려고 하다보니 풀이가 지저분해지는 경향이 있다. 풀이를 깔끔하게 쓰는 것을 최소한 연습할 때는 해봐야겠다. 그리고 나만의 스킬도 만들어야겠다. PSAT공부할 때 했던 것들이 몸에서 스스로 잘 나오면 좋겠다.

 

나는 해보기 전까지는 걱정을 많이 한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그러나 해보고 나면 그래도 어느정도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고 하면 괜찮아진다.

너무 어렵고 힘든 방향으로는 잘 안간다.

정말 열심히 해보는데까지 해보고 안되면 그만둔다.

 

나도 정말 뭔가 요즘에는 정착하고 싶다는 생각이든다.

지금까지는 정말 이곳 저곳 하고 싶은 게 많아서 다 해보고 싶었으나, 이제는 뭔가 내가 쭉 해나갈 것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삶은 내게 계속 무언가를 준다. 그리고 그것들이 맘에 안들면 그건 내 내면의 문제의 발현이지 결코 외부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최대한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세로 나아가야 한다. 어떤 것도 본질적으로 어떤 사건이지 사실 본질적으로 절대적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판단을 놓고 판단이 내려진다면 그 판단하는 내 안의 전제, 사고 체계를 놓아야 한다. 최소한 그렇게 빨리 노력해야 한다.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는 방식이 바로 사실 거기에 있다. 시간이 지나서 해결되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조금 쉽게 내려놓을 수 있고 사고체계도 조금 바뀌기 때문이다. 애초에 사고체계와 전제를 최대한 가지지 않는 것이 좋다. 항상 무지의 장막 뒤로 돌아가서 삶을 사는 습관이 필요하다. 결국 나는 모르고 무엇이 최선인지 모른다. 그 자리에 머물러야 한다. 내가 무엇이 최선인지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고통의 씨앗을 뿌린 것이다. 우리가 무엇이 최선인지 안다고 말하면 이제 그것에 따라서 판단한다. 좋은 것을 쫓고 나쁜 것을 피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우리에게 무엇이 최선인지 아는가? 우리가 가진 가치체계가 전 우주적으로도 타당한가? 그것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의식은 한계에 부딪힐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극심한 한계를 가진 의식, 즉 언어적 구조물이 판단하고 그 판단에 따라서 우리가 움직인다면 갈등은 필연적이다. 하지만 완전히 반대로 의식의 무지와 한계를 인정하고 사건들에 대해서 어떤 판단을 최대한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주의 리듬에 점점 스며들고 맞춰진다. 그리고 자연스러운 갈등없는 삶과 사회가 펼쳐진다.

 

결국 수용과 무지는 하나다. 한계를 받아들이고 의식이 무지의 상태로 돌아가면 자연이 일으키는 사건들과 나와의 갈등은 거의 줄어든다.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모른다는 상태와 생각의 정지는 자연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여지를 만든다. 물론 생각하는 의식도 자연의 일부이기에 이 생각도 그 자신의 자리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생각을 결코 나 자신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이 생각으로부터 언제나 쉽게 떠날 수 있도록 생각을 멈추고 깊은 수준의 나를 찾아가는 연습을 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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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즘 한 건설 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

관리자들은 많다 그리고 게으르고 사실상 크게 중요한 일은 많이 안한다.

반면 실제로 짓는 사람들은 나이드신 노동자 분들이다.

거의 60대 후반이 된 분들이 많다.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들이다.

 

건설이나 사회에서는 크게 관리와 노동으로 나눠진다. 생산과 경영같은 느낌이다.

건설현장에서 보는 것은 우리 사회다.

과연 우리 사회의 관리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분명 하는 것이 없다.

 

박사, 연구원, 관료, 관리직들은 사실상 국가와 사회의 돈을 받고 ChatGPT에게 뒤지는 논문과 글들, 사업들을 한다.

이들은 진정으로 현장의 목소리와 현실, 그리고 그 현실속의 사람들의 말을 들으려는 노력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 챙긴다.

 

다들 대기업을 가고 모든 시스템이 갖추어진 곳에서 근무하고자 한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그럴자격이 있을까? 그리고 그런 곳에서 근무한다면 사회에 어떤 기여를 해야할까?

나는 사람들이 나는 과연 이 사회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진정으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철저하게 자주 반성을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반성속에서 사회를 위한 생각과 발상이 떠오르는 것이다.

 

애초에 이 나라의 식자들은 의지가 없다.

모두 자신의 출세에 미쳐 현실을 보지 못하고 앞만 달려가고 있다.

과연 이렇게 얼마나 갈 수 있을까?

 

최근 아파트 및 건물 붕괴사고를 보며 마치 97년 IMF 전의 한국이 생각난다.

과연 또 IMF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있을까?

 

건설현장에서 앞으로 5년 이내 빠 속도로 기능공 인력 부족이 생길 것이다.

마찬가지로 공장에서도 앞으로 5년 이내 빠른 속도로 노동자 부족이 생길 것이다.

우리나라 산업 전반에 노동부족 현상이 심각해질 것이고 외국인 노동자들이 들어오게 될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이 학계에만 또 산업계에만 있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현장과 소통하는 학문이 되어야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용기가 있어야 한다.

음양의 조화가 항상 중요하다. 이론과 실무의 조화가 매우 중요하다.

 

AI시대라고 하지만 결국 데이터의 확보가 중요하다.

그리고 데이터를 모으는 것도 사람들의 합의와 이해를 바탕으로 해야된다.

합의와 이해라는 소통과정 없이는 의미있는 데이터는 모이지 않는다.

 

합의와 이해를 바탕으로 만드는 사업이 플랫폼 사업이다.

플랫폼에서 제공되는 서비스들은 표준화되고 규격화 되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자주 사용하는 것들이다.

이 플랫폼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정보 흐름을 최적화하는 것이 곧 플랫폼 비지니스이다.

 

이 플랫폼 비지니스는 사실 합의의 사업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합의를 한 프로세스를 전산화하고 그 전산화에서 쌓이는 데이터를 기반으로 정보흐름을 최적화하는 것이다.

정보흐름의 최적화는 메일링, 문서작업, 단순 반복 기입업무 등 다양한 것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장기적으로 진화가능한 표준프로세스를 만드는 것이 정말 생각보다 인문학적 문제다.

결국은 정치의 문제로 귀결된다.

타다의 사례처럼 결국은 기술이 없는 것이 아니다. 택시타는 표준프로세스는 이미 너무도 공유가 되어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합의다. 그러므로 정치적 사회적 합의만 이루어진다면 우리 사회는 더 가치를 창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합의도출에 실패했고 우리사회는 사회적 자원최적화를 하면서 생산성향상을 통한 진정한 의미의 경제성장을 이룩할 기회를 잃었다.

 

건설은 특히 표준이 되어있기 힘든 산업적 특성이 있다. 그러므로 더욱 표준을 적용하고 노력하려고 해야한다.

진정으로 필요와 이해를 바탕으로 한 합의는 구성원들에 의해서 존중받고 힘을 발휘한다.

그러나 그런 절차없이 일방적인 표준은 종이에 불과하다.

노동자부터 사장까지 모두가 함께 표준에 동의하고 이해하고 참여해야 의미가 있는 표준이 된다.

 

결국 우리는 이런 사회적 정치적 과정에 실패하고 기술타령을 한다.

지금 대한민국은 기술이 부족한 것이 아니다. 지식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소통이 부족하다.

 

우리의 국회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매일 보여준다.

표준화된 과정과 절차를 통한 소통이 아닌 과정과 절차를 우회하는 절차적 폭력의 소통법이 국회를 지배한다.

결국 우리는 대통령을 찾아가 호소해서 결정해야한다.

대통령 권한집중은 국회가 자발적으로 만든 것이지 결코 법적 제도적 문제가 아니다. 

국회가 절차를 존중하고 올바른 절차에 따른 결과를 수용하는 태도를 가지며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 양보하는 미덕을 갖추려고 노력만 한다면 이런 사회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어려운 사회다. 간신히 버틴다는 느낌이 든다.

건설 현장을 보면 느껴진다. 우리 사회가 간신히 버티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이제 시간이 정말 얼마남지 않았다는 것이 느껴진다.

앞으로 5년이다. 기존 우리 사회의 엘리트들이 답을 찾아내지 못하면 자연의 법칙이 답을 찾아낼 것이다.

 

자연은 죽음이라는 매커니즘으로 매우 쉽고 간단하게 일을 처리한다.

우리사회의 기존 엘리트 집단이 빠르게 무너질 수 있다.

역사는 자연의 법칙에 대해서 항상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 사회의 특징을 고려하면 5년내에 답이 나올 것이다.

누군가는 대한민국이 일본처럼 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일본과 한국은 질적으로 다른 문화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恨의 문화다. 우리는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변화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노동자다. 그리고 지식인은 그 노동자들을 위해 살아야한다. 그 지식인을 먹이고 키운 것은 노동자의 피와 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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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렇게 온라인에 불안에 대해서 글을 쓰면 내 불안이 조금 줄어드는 것 같아 다시 글을 쓴다.

 

나는 건설업계의 한 회사를 다니고 있다. 첫 직장이었고 다닌 지는 1년이 채 안되었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충분히 많은 것을 지금까지 배웠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대기업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대형 건설사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고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나는 대기업의 신입 공채를 써보려고 한다.

지금 다니는 직장 분들에게 조금 미안하기도 하다.

다들 잘해주셨고 고맙다. 그리고 내가 휴가를 쓰며 다른 직장을 준비하는 것을 알아채면 어떻게 생각할지 조금 걱정이 된다.

만약 내가 이번에 공채를 모두 떨어지면 나는 다시 이 회사를 다니게 될 것 같은데 그것이 걱정이다.

 

사람들은 내가 걱정이 너무 많다고 한다. 나는 정말 걱정을 사서한다.

나는 유튜브에서 홍익학당을 종종 본다. 여기서 정말 좋은 삶의 자세를 알려준다.

내맡기는 삶.

내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 삶.

이런 삶의 자세를 가지면 참 마음이 편할 것 같다.

실로 우리의 감각과 지각능력은 너무도 제한적이고 우리의 생각은 조악한 언어의 잡음일 뿐이다.

이 상황에서 이 우주의 현상인 삶을 통제한다는 것은 가히 불가능하다.

나는 이것을 이해하고 또 이해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나는 여전히 이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삶을 살지는 않는다.

나는 욕심이 아직도 있다. '그래도 이 정도는 원한다.' 이 마음이 불안의 원천이다.

'이 정도는 원합니다. 이건 좀 되게 안 되나요? 그 나머지는 하나님 맘대로 하세요 이런 느낌이다.'

완전히 맡기기는 정말 어렵다. 하지만 이 점에서는 완전히 맡기거나 아니면 안 맡기거나 이 둘밖에 없는 것 같기는 하다.

나는 정말 내맡기는 삶을 정말로 살고 싶다. 이 삶을 위한 연구를 얼마나 해왔던가?

그러나 내가 돌아볼 때, 나는 결코 내 맡 기지를 못했다.

항상 욕심으로 걱정과 불안 속에 살았다.

나 자신을 증명하고 인정받으려는 욕심에 나는 대자연과 하나가 되지 못했다.

언제나 분리된 채 두려움에 떨며 겨우겨우 살았다.

나는 정말 운도 좋고 좋은 사람도 곁에 많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충분히 즐기지를 못했다.

 

마이클 싱어라는 사람의 책과 글, 강의도 이 내용을 강조한다.

모든 것에 판단을 중지할 것. 이 사건이 내게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판단하지 말 것.

사실 실로 어떤 것이 좋은지 나쁜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어떤 모델 내에서 나쁜 것과 좋은 것은 생길 수 있지만 그 모델의 전제가 되는 가치체계가 진정으로 좋은 가치인지는 생각해봐야 한다.

그리고 전 우주적 규모에서 우주는 항상 우주가 좋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 수밖에 없다.

우주의 가치체계를 알고 있는가? 나는 모른다. 따라서 우리의 제한된 가치 체계는 우주와 갈등을 일으키고 폭력을 발생시킨다.

그러나 우리가 판단을 모두 내려놓을 때, 폭력도 사라지고 갈등도 사라지며 평화가 찾아온다.

 

무엇이 내게 최선인가? 우리는 모두 모른다. 그래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해서 수용하고 받아들이며 판단을 저 멀리 보류하는 길 밖에는 없는 것이다.

 

마윈에게 취업이 되는 것은 행운이었을까? 그 좋아 보이는 것이 그의 삶을 제한하는 것으로 작용하지는 않았을까?

AI를 학습하며 생기는 Local Minimum에 모델이 빠지듯, 우리도 삶에서 Local Minimum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이때 모델을 Local Minimum에서 나오게 하기 위해 무작위적 충격을 준다. 마치 우리 삶에 충격이 오듯 말이다.

 

자연은 우리가 유연하고 집착 없이 사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것 같이 언제나 고정된 무엇은 변화시킨다. 그 어떤 것도 일정하게 고정되어있지 않다. 끝없이 변하고 그래서 충격은 언제나 일상적으로 우리에게 온다. 다만 이 충격이 너무 크지 않도록 일상에서 이 충격에 대비해 조금씩 조금씩 변화를 인식하고 그에 적응하고 변화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하지만 너무도 자주 우리는 결코 변화를 인식하지도 않으며 무시한다. 

 

끊임없이 변하고 변해야 한다. 그리고 그 변화를 쉽고 자연스럽게 생각해야 한다. 변하지 않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쉬지 않고 모든 것을 바꿔야 한다. 바꾸는 데 최고는 버리는 것이다. 버리면 새 것이 찬다. 지식도 버리고, 인간관계도 정리하고, 돈도 쓰자. 그럼 새로운 생각, 사람, 돈이 흘러 들어온다.

 

고착되고 바뀌지 않는다는 것은 성장이 멈추고 충격이 다가온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작은 충격을 미리 만들어 자신을 비우고 또 채워야 한다. 이것을 쉽게 하는 법은 집착을 내려놓는 것이다. 모든 것에 대해서 집착을 내려 놓아야 한다. 집착은 비우는 것을 어렵게 하고 변화에 저항하여 고통을 일으키는 근원이다. 놓고 또 놓자. 특히 정신적 구조물을 놓아야 한다. 정신적 습관을 버리고 완전히 중요성을 내버리는 연습을 끝없이 해야한다.

 

가장 좋은 것 중 하나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다. 죽음을 생각하면 정신적 구조물들의 가치가 거의 사라진다. 중요하게 생각했던 다양한 것들이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음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 허무 속에서 진정한 자신의 가치가 태어난다.

 

내 삶을 마무리 하는 순간,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그리고 지금의 나에게 죽는 순간의 내가 무슨 말을 할 것 같은가? 내게 대기업 공채를 두려워하라고 할까? 아니면 편안하게 삶을 즐기라고 할까? 결국은 모든 것은 소멸하기 마련이다. 불안이 무슨 의미인가? 그저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결과를 받아들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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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불안하다. 

이 끊임없는 불안의 근원은 '나'라는 주체의식이다.

이것이 너무도 강하여 논리적으로 '나'라고 하는 것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허구의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여도 수천년동안 인류의 문화속에 내재되어 가져온 이 느낌과 개념은 일상을 지배하고 여기서 벗어나기가 너무도 어렵다.

주변의 영향을 받을 수 받게 없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나는 '나'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움직이고 있다.

 

그저 편안하게 힘을 빼고 살 수는 없을까? 결국 우리는 하나의 우주속에 존재들이고 그러므로 이어져 하나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독립적인 '나'라는 존재가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여러사람들 속의 네트워크적 존재이다. '나'는 그러므로 육체를 넘어 그 모든 총체에서 일부분의 의식이다. 그리고 이 의식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은 모두 그러한 의식속에 함께 있기에 아주 일부분인 '나'를 변화시키는 것은 전체 네트워크가 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면 '나'를 확장시켜 인식하고 그렇게 확장된 의식속에서 '나'를 바라봐야 변화가 쉬워지는 것 같다.

 

'나'의 불안은 많은 사회구성원들의 불안을 대표한다. '나'의 정신세계는 같은 사회를 사는 사람들끼리 공유된 정신세계를 바탕으로 하기에 그 원초적 구조적 갈등은 모두 동일한 방식으로 움직인다. 이 사회의 정신세계를 인식하고 변화시키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변화를 일으킨다면 사회는 빠르게 변한다. 불안 사회에서 불안하지 않는 정신세계를 구축하기 위해서 우리는 용기를 가지고 '나'라는 개념을 놓아야 한다. 너무도 간단하면서도 실로 도달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우주의 흐름대로 움직이는 존재가 '나'이다. 그러므로 이 흐름에 몸을 맡겨야 한다. 그래야 갈등이 사라지고 폭력이 사라진다. 하지만 이 흐름을 타는 것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욕망과 이기심이 몰려오는 인간의 삶에서 어떻게 다시금 자연의 흐름에 몸을 맡길 수 있을까?

 

하나님, 신, 부처님, 대우주. 이 거대한 모든 것의 총체에게 자기 자신이 귀의하는 것은 실상을 보는 것과 같다. 실로 우리는 우주의 일부분으로서 우주의 법칙이 일으키는 현상이다. 이 우주의 현상으로서의 인간의 삶에서 고통을 참으로 희안한 현상이다. 우리에게 고통이 있다면 이 우주가 고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삶은 대우주와 '나'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이 개체적 자아와 전체성을 통합할 수 있을까?

 

이 강력한 삶의 흐름에 저항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나아가는 것이 어려운 이유중 하나는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을 것 같다는 것이다. 더 좋은 선택을 하고 싶다. 실패하지 않고 잘 사는 선택을 하고 싶다. 하지만 나는 무엇이 정말 장기적으로 옳은지 모른다. 따라서 현실은 무지의 안개속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제한된 지식과 경험을 통해서 선택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우주의 흐름과 함께 가는 삶을 산다면 거기에 선택이 있을까? 우리는 최선의 선택으로 움직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최선이 무엇인지는 우리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맡기고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리고 그 한계를 직시해야한다.

 

우리는 삶의 한계를 깨달으며 불안하다. 우리는 언제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고 두려울 뿐이다. 이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서 수많은 것들을 시도하지만 결국 우리가 '나'라는 주체성을 놓지 않으면 폭력과 갈등은 계속해서 일어날 것이다. 세계평화는 결국 이 '나'의 해체와 재구성에서 비롯될 것이다. '나'를 해체하고 이것을 재해석하여 그 한계에 맞게 사용한다면 갈등과 폭력은 줄어들고 공감과 소통의 가능성은 크게 증대될 것이다. 나는 의지하고 욕망하고 선택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해하고 공감하고 도구적으로 한계를 가진 존재로서 다루어져야 한다. 이 의지하고 욕망하고 선택하는 존재가 '나'가 아니라 더 깊은 수준의 '나'를 발견하는 것이 재해석이다. 이 새롭게 발견된 '나'는 이해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으며 상처받을 수 없는 존재이다. 이 '나'를 발견해야한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발견되어질 수 없다. 

 

만약 사람들이 욕망하고 선택하는 '나'를 버릴 수 있다면 그리고 진정한 '나'를 찾는다면 국가도 변하여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갈등과 폭력을 사용하는 비율이 현저하게 줄어들며 정부의 한계를 이해하고 사회의 자연스러운 변화에 많은 것을 맡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부는 제도적 장치로서 Ego적이다. 이 사회의 Ego를 국가 자체라고 생각하는 오류는 많은 문제를 야기 시킨다. 이것은 어떤 도구적 장치로서 언어적이다. 실로 이 정부는 사회의 정보 집합 처리 장치이다. 여기서 정보가 잘 흐를 때 폭력이 아니라 공감과 소통이 일어나 무엇이 바른 것인지 쉽게 찾고 자연스럽게 사회가 발전할 것이다.

 

개인의 정보 집합 처리장치가 '나'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한다. 이 정보 처리장치에 정보가 원활하게 흐르면 선택을 하고 고민하는 것이 줄어들고 자연스럽게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행동해야할 지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고민하고 불안하다면 이것은 매우 협소한 사고를 가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넓게 개인적 '나'를 놓으면 편안함이 찾아온다. 그리고 그 상태를 최대한 유지하려고 노력해야한다. 이것이 진정으로 21세기 인간형이다. 

 

'나'라는 개념은 언어적이어서 생각하는 '나'는 결국 언어이며 이 '나'가 바라보는 세상은 언어의 밀도를 가져 물자체의 실상을 볼 수 없다. 이 '나'를 초월하면 언어를 초월하여 실상과 마주할 수 있다. 이 '나'라는 언어적 자아의 의식은 언어기제이다. 이것이 만든 세상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다. 이 언어적 현실을 뛰어 넘어야 한다. 물자체의 세계는 끊임없이 변하고 뭐라 규정할 수도 없는 것이다. 언어적 해석은 끊임없이 이를 뒤쫓는다. 하지만 실상은 결코 볼 수 없다. 마치 우리가 사진을 찍고 실상의 아름다움은 스크린으로 밖에 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우리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자신에게 말하며 생각을 멈추면 편안함이 찾아온다. 그리고 그것은 실로 진리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확실히 알지 못한다. 대부분의 것들에 대해서 모른다. 언어적 '나'에게 이해가 찾아오기 위해서는 실상의 세계에서 어떤 우리가 언어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야 한다. 이 비언어적 움직임이 실상이다. 그러므로 현실을 변화시키는 진정한 힘은 결코 '나'의 생각이 알 수 없다. '나'는 실제로 변화를 일으키는 주체가 아니다. 진정한 '나'의 의지는 어쩌면 그래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 현상 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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