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Thoughts

말랑거리는 삶 : 무지와 무능력에 대한 인식

OverMan 2024. 5. 13. 19:37

의미는 맥락에서 나온다. '나는 왜 사는가?'
과거와 미래 사이의 현재에서 우리는 삶의 의미를 헤아린다.
그러나 과거는 끊임없이 현재의 필터에 의해 그 해석이 달라진다.
과거는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다.
미래는 끊임없는 불확실성의 영역이다.

과거는 집착이고 미래는 추구다.
집착과 추구는 고통의 씨앗이 된다.
세상은 늘 변하기에 어떠한 대상에 집착을 하면 그것을 잃는 고통이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추구는 끊임없는 결핍이며 고통을 낳는다.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기회는 지금 이 순간이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미래와 과거를 초월해야만 한다.
시간을 초월해 진정한 자신이 되어야 한다.

의미있는 삶은 현재의 순간에 자신이 어떤 태도로 사는가에 전적으로 달려있다.
의미는 미래에도 현재에도 없다. 오로지 지금 내가 어떤 태도로 이 순간을 살아가는가에만 달려있다.
그러나 자신있는 태도는 진정한 의미를 발견한 사람에게 가능하다.
진정한 의미란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당신 안에 존재하기에 그것을 쫓을 필요는 없다.
오로지 그것을 보여주면 된다.
이 세상에 당신의 태도로서 이미 당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어떤 것도 그보다 더 당신 스스로에게 가치를 가질 수는 없다.

과거의 영광도 지나간 것이며 돌아오지 못한다. 이미 그 우주는 돌아갈 수 없는 곳이다.
미래는 결코 확실하게 알 수 없는 것이다. 미래는 영원히 갈 수 없는 우주다.
당신이 가진 것은 오로지 현재 밖에 없다.

당신의 현재에 무엇을 담고자 하는가?
당신의 삶의 태도가 오로지 현재에 새겨지는 것이다.
이 축적된 태도가 곧 당신의 삶이 되는 것이다.

자신있는 태도를 가지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도전받는다.
과거로부터의 기억들은 우리를 규정짓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간직하고자 하는 마음이 강하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모습에 자신을 잃고 다른 사람의 것을 추구한다.

이러한 밖으로 튀어나가는 우리의 마음을 다시 현재로 옮겨와야 한다.
그리고 이미 모든 것이 자기 자신 안에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며 무엇을 해야할 지도 모른다.'
이것이 진정으로 솔직한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무엇을 해야하는 지도 모른다'
불확실한 우리의 삶 속에서 내게 무엇이 진정으로 최선인지 나는 모른다.

자신이 추구하던 것들은 사실 대상에 본질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원했던 그 느낌이었다.
이 느낌은 그러나 이미 당신 안에 있기에 그 느낌을 추구하는 것이다.

실로 우리는 깊이 생각해본다면 실로 확실히 아는 것이 거의 없다.
그러나 우리의 무지 수준에 비해서 우리는 너무도 우리 자신에게 확신을 가지고 산다.
이렇기에 삶 속의 고통의 수준이 커지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무지와 무능력에 대한 인식은 우리의 완고했던 사고방식을 말랑거리게 한다.
그리고 삶이 가져다주는 미지의 우연한 것들을 받아들이 공간이 생긴다.
이 공간 속에서 우리는 여유를 가지고 미지의 것을 탐구하고 받아들일 준비를 할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마치 원시의 단세포 생물이 미토콘드리아를 품을 때 2중막으로 거리를 두는 것과 같다.

우리는 자신의 무지를 철저하게 인정해야 한다.
무지를 통해 우리가 삶이 가져오는 말랑함을 얻었을 때, 우연성의 향연이 시작된다.
그리고 이 우연성은 우리에게 호기심을 일으키고 매 순간이 의미가 넘치는 삶이 된다.

명확하고 굳센 목표가 없기에 삶은 전쟁에서 산책이 된다.
굳센 목표는 현재를 수단화 한다. 지나가야할 어떤 시간에 불과하게 된다.

무지를 인정하면 우리는 매 순간 자신있는 태도로 살 수 있고 매 순간에 감사할 수 있다.
우연한 사건들이 우리에게 다가오더라도 그 손님을 예의와 겸손으로 대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세상에 대해서 무지하며 통제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을 정도로 무능력하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그러면 자신을 무겁게 짓누르던 '그래야만 한다'라는 족쇄에서 벗어나 가볍게 삶을 거닐 수 있다.

나는 내가 왜 이렇게 사는지도 또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도 모른다.
확신이 없이 살아가는 삶은 흥미진진한 소설을 한장씩 넘기는 것과 같다.
실수와 실패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나아가 실패와 실수도 없는 것이다. 그저 어떤 경험에 불과한 것이다.

진정으로 자기 자신이 원하는 의미는 우리가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지켜야할 것이 없을 때, 자연스럽게 현재를 대하는 우리의 자신감 있는 태도로 드러난다.
'잘 모르고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자신'을 받아들이면 지키고 해결해야할 문제들도 거의 사라진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기존의 사고방식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시각으로 현실을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새로운 시각은 창조적 행위를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그럴때 그 어려움을 벗어날 수 있는 지혜가 드러난다.

삶의 어려움은 편협한 시각의 산물이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우리가 헤쳐나갈 가능성은 있다. 문제는 딱딱한 정신으로는 이 가능성의 빛을 보기가 어렴다.
넓고 맑은 창의 마음은 한줄기의 가는 빛도 받아들일 수 있지만 탁하고 좁은 창은 대낮의 햇볕도 잘 들어가기 어렵다.

우리의 마음이 어둡고 좁아지는 이유는 과거의 정체성에 묶이고 자신이 무언가를 할 수 있고 잘 알고 있다는 착각속에서 행동하기 때문이다.
마음의 유리를 맑게 닦는 법은 죽음을 생각하며 과거의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고 미래에 대한 과도한 기대를 버리는 것이다.
마음의 유리를 넓히는 것은 자신의 무지와 무능력을 분명히 깨달아 우연하게 다가오는 손님과 같은 순간들을 대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