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불안하다. 

이 끊임없는 불안의 근원은 '나'라는 주체의식이다.

이것이 너무도 강하여 논리적으로 '나'라고 하는 것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허구의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여도 수천년동안 인류의 문화속에 내재되어 가져온 이 느낌과 개념은 일상을 지배하고 여기서 벗어나기가 너무도 어렵다.

주변의 영향을 받을 수 받게 없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나는 '나'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움직이고 있다.

 

그저 편안하게 힘을 빼고 살 수는 없을까? 결국 우리는 하나의 우주속에 존재들이고 그러므로 이어져 하나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독립적인 '나'라는 존재가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여러사람들 속의 네트워크적 존재이다. '나'는 그러므로 육체를 넘어 그 모든 총체에서 일부분의 의식이다. 그리고 이 의식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은 모두 그러한 의식속에 함께 있기에 아주 일부분인 '나'를 변화시키는 것은 전체 네트워크가 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면 '나'를 확장시켜 인식하고 그렇게 확장된 의식속에서 '나'를 바라봐야 변화가 쉬워지는 것 같다.

 

'나'의 불안은 많은 사회구성원들의 불안을 대표한다. '나'의 정신세계는 같은 사회를 사는 사람들끼리 공유된 정신세계를 바탕으로 하기에 그 원초적 구조적 갈등은 모두 동일한 방식으로 움직인다. 이 사회의 정신세계를 인식하고 변화시키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변화를 일으킨다면 사회는 빠르게 변한다. 불안 사회에서 불안하지 않는 정신세계를 구축하기 위해서 우리는 용기를 가지고 '나'라는 개념을 놓아야 한다. 너무도 간단하면서도 실로 도달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우주의 흐름대로 움직이는 존재가 '나'이다. 그러므로 이 흐름에 몸을 맡겨야 한다. 그래야 갈등이 사라지고 폭력이 사라진다. 하지만 이 흐름을 타는 것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욕망과 이기심이 몰려오는 인간의 삶에서 어떻게 다시금 자연의 흐름에 몸을 맡길 수 있을까?

 

하나님, 신, 부처님, 대우주. 이 거대한 모든 것의 총체에게 자기 자신이 귀의하는 것은 실상을 보는 것과 같다. 실로 우리는 우주의 일부분으로서 우주의 법칙이 일으키는 현상이다. 이 우주의 현상으로서의 인간의 삶에서 고통을 참으로 희안한 현상이다. 우리에게 고통이 있다면 이 우주가 고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삶은 대우주와 '나'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이 개체적 자아와 전체성을 통합할 수 있을까?

 

이 강력한 삶의 흐름에 저항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나아가는 것이 어려운 이유중 하나는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을 것 같다는 것이다. 더 좋은 선택을 하고 싶다. 실패하지 않고 잘 사는 선택을 하고 싶다. 하지만 나는 무엇이 정말 장기적으로 옳은지 모른다. 따라서 현실은 무지의 안개속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제한된 지식과 경험을 통해서 선택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우주의 흐름과 함께 가는 삶을 산다면 거기에 선택이 있을까? 우리는 최선의 선택으로 움직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최선이 무엇인지는 우리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맡기고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리고 그 한계를 직시해야한다.

 

우리는 삶의 한계를 깨달으며 불안하다. 우리는 언제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고 두려울 뿐이다. 이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서 수많은 것들을 시도하지만 결국 우리가 '나'라는 주체성을 놓지 않으면 폭력과 갈등은 계속해서 일어날 것이다. 세계평화는 결국 이 '나'의 해체와 재구성에서 비롯될 것이다. '나'를 해체하고 이것을 재해석하여 그 한계에 맞게 사용한다면 갈등과 폭력은 줄어들고 공감과 소통의 가능성은 크게 증대될 것이다. 나는 의지하고 욕망하고 선택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해하고 공감하고 도구적으로 한계를 가진 존재로서 다루어져야 한다. 이 의지하고 욕망하고 선택하는 존재가 '나'가 아니라 더 깊은 수준의 '나'를 발견하는 것이 재해석이다. 이 새롭게 발견된 '나'는 이해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으며 상처받을 수 없는 존재이다. 이 '나'를 발견해야한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발견되어질 수 없다. 

 

만약 사람들이 욕망하고 선택하는 '나'를 버릴 수 있다면 그리고 진정한 '나'를 찾는다면 국가도 변하여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갈등과 폭력을 사용하는 비율이 현저하게 줄어들며 정부의 한계를 이해하고 사회의 자연스러운 변화에 많은 것을 맡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부는 제도적 장치로서 Ego적이다. 이 사회의 Ego를 국가 자체라고 생각하는 오류는 많은 문제를 야기 시킨다. 이것은 어떤 도구적 장치로서 언어적이다. 실로 이 정부는 사회의 정보 집합 처리 장치이다. 여기서 정보가 잘 흐를 때 폭력이 아니라 공감과 소통이 일어나 무엇이 바른 것인지 쉽게 찾고 자연스럽게 사회가 발전할 것이다.

 

개인의 정보 집합 처리장치가 '나'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한다. 이 정보 처리장치에 정보가 원활하게 흐르면 선택을 하고 고민하는 것이 줄어들고 자연스럽게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행동해야할 지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고민하고 불안하다면 이것은 매우 협소한 사고를 가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넓게 개인적 '나'를 놓으면 편안함이 찾아온다. 그리고 그 상태를 최대한 유지하려고 노력해야한다. 이것이 진정으로 21세기 인간형이다. 

 

'나'라는 개념은 언어적이어서 생각하는 '나'는 결국 언어이며 이 '나'가 바라보는 세상은 언어의 밀도를 가져 물자체의 실상을 볼 수 없다. 이 '나'를 초월하면 언어를 초월하여 실상과 마주할 수 있다. 이 '나'라는 언어적 자아의 의식은 언어기제이다. 이것이 만든 세상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다. 이 언어적 현실을 뛰어 넘어야 한다. 물자체의 세계는 끊임없이 변하고 뭐라 규정할 수도 없는 것이다. 언어적 해석은 끊임없이 이를 뒤쫓는다. 하지만 실상은 결코 볼 수 없다. 마치 우리가 사진을 찍고 실상의 아름다움은 스크린으로 밖에 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우리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자신에게 말하며 생각을 멈추면 편안함이 찾아온다. 그리고 그것은 실로 진리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확실히 알지 못한다. 대부분의 것들에 대해서 모른다. 언어적 '나'에게 이해가 찾아오기 위해서는 실상의 세계에서 어떤 우리가 언어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야 한다. 이 비언어적 움직임이 실상이다. 그러므로 현실을 변화시키는 진정한 힘은 결코 '나'의 생각이 알 수 없다. '나'는 실제로 변화를 일으키는 주체가 아니다. 진정한 '나'의 의지는 어쩌면 그래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 현상 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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